51회 서정빈님의 중동학원에 대한 증언과 간증
- 김종진(70)
- 2024.09.26 09:48
- 조회 84
- 추천 0
- 나는 中東의 크리스챤이다證言과 干證 (확정본)51회 서정빈1, 이 자리 서기 까지백강수회장과 중동 후배들이 이 교회에서 예배와 사랑방을 열었다고 해서 2023년부터 이 교회를 찾기 시작하였고 2023년 10월 윤용식(방송대 인문대학장 역임) 후배 간증행사 부터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20회 가까이 이 교회를 찾은 것으로 기억됩니다. 간증시작 무렵 백강수 회장으로 부터 간증 요청을 받았으나 때가 아니라 간곡히 거절하였는데 한 일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이 자리에 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아마 백강수회장의 섬김에 대한 열정과 선,후배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알게 모르게 감동감화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 합니다거룩한 교회 강단에 서서 난생 처음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와 건강을 주신 점에 새삼 감사를 드리며 이 교회의 주인 되는 하나님과 담임목사이신 최명우 목사님께 감사 드립니다 아울러 신우회 여러 후배님들에게도 깊은 감사 드립니다2.삼성그룹의 중동학원 재단 인수*당시 중동학원의 재단 상태1994년경 중동학원은 강당을 교회에 임대해 주고 학교 운동장을 교회 주차장으로 사용할 수 있게 승인하여 방과 후 휴일에도 축구나 농구도 학생들이 뛰여 놀 공간도 없었고 날마다 재단이사장은 빚쟁이에게 시달리고 자금을 구해 이자 막기가 다급했고 (설립자 최규동의 장남인 외과의사 최성장이 재단이사장을 하다가 사망하자 동생인 최성악이 재단이사장이 되면서 처음에는 교회에서 13억5천만원을 빌렸음 )선생님들의 살고 있는 집들을 은행에 대출받아 사용 하는 등 최악의 재정상태로 꺼져가는 등불 이였다. 전체 교사들과 학생 학부모들은 온통 불안과 위기기감에 사로 잡혔다1992경 중동학원의 사실상의 부도로 일원동의 嚴冬雪寒이 시작되었다*싼타크로스의 出現1992년경 중동학원의 사실상의 부도로 6만여 명의 동문들의 염려와 학부모 학생들 그리고 선생님들의 심정은 자포자기였는데 49회 안동선 총동문회장으로 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정빈아 64회 김무성이 잘 아냐?” “네 잘 알아요” “그럼 자리 좀 만들어 같이 중동 학교 좀 살려 보자” 하여 나는 김무성에게 전화를 하여 코리아나 호텔 커피숖에서 49회 안동선 총동문회 회장, 김운환 중동고등학교 교사(50회.작고), 64회 김무성 민정수석, 51회 서정빈 총동문회 사무총장이 의기가 투합 역사적인 회동을 하게 되었다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중동중학을(당시는 5년제로 중동을 다니다가 일본으로 유학) 다닌 것을 명분으로 하여 학교재단을 삼성이 인수하도록 잠정 합의를 본 후김무성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은 삼성그룹 이건희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안동선 국회상공위원장(3선)이 방문을 할 터이니 이건희 회장과 자리를 주선하라고 요구하여 만나게 되였으며 안동선위원장은 학교의 어려운 현실과 이병철회장이 중동학원과의 인연과 당시 시끄러웠던 성균관 대학과의 관계를 소상히 설명하여 이를 들은 이건희 회장은 비서실장을 불러 적극 협조하라고 지시하여 사실상 승낙하게 되었다그래서 중동은 기사회생하게 되었고 일원동의 봄이 시작되었다학교 재단이 워낙 다급한 사정이라 삼성그룹에서 인수 직전 당시 모교 강당을 빌려서 예배를 보던 남서울 은혜 교회(홍정길 목사)에서 모교 부실 재단을 인수를 검토 중에 있었는데 며칠 후 외환은행 서소문지점장과 담당 과장이 모교를 방문하여 부채신고를 받고 교회장로를 만나 협의를 하여 원금과 이자를 지불하였더니 장로가 갑자기 이 금액 가지고 어떻하냐? 삼성에서 인수한다고 하는데 더 달라고 떼를 써서 일부 더 지불하고 우선 교회를 재단으로 부터 손을 떼게 하여 교회에서 사용하던 강당과 운동장을 돌려받아 학생들이 마음껏 뛰여 놀을 수 있게 만들었고당시 재단이 안고 있는 부채가 심각하였는데 중동 중,고등학교 교장과 교사들의 집을 담보 대출받아 사용했던 것을 전부 상환 저당권을 해지하여 교장과 교사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여 주었으며 사채업자 채무까지 모두 청산하게 되어 학교는 빚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 감격시대를 맞이 하게 되었다또 삼성그룹에서는 중동 출신 52회 오성환 삼성건설 부사장을(조선호텔을 최초로 지은사람) 책임자로 파견하여 우선 건물외벽을 깨끗이 도색하고 복도 마다 대형 정수기를 설치하여 이른바 왕뚜껑 라면의 물 받는 속도도 최고로 하여 학생들이 줄을 서지도 않게 하였고 각 학급 마다 최신 모니터와 고가의 방송 장비 등을 부착하여 학생들에게 책상을 가지고 운동장으로 나오게 하여 새 책상으로 바꾸어 가게 하였으며 당시로는 분필 없는 칠판을 설치 수업 외적인 환경도 친환경 소재로 개선하게 되어 하는 등 중동의 시설은 초일류를 향하게 되었다정주영의 소떼 방북 같은 감동을 학생과 학부형과 동문들에게 선사했고 심지여 선생님들은 감격에 안도하시였다그리고 선생님들을 모아 월급을 50%인상 하여(정확한 퍼센트는 기억 못함) 이른바 촌지를 못 받게 하여 맑은 교권을 확립하였고 매년 미주 구라파 일본 등 순번대로 해외여행을 선생님들에게 제공하여 견문을 넓히고 교사들의 자부심을 고취 이듬해부터는 교사 채용 공고가 나가면 박사급들이 교수는 안하고 선생으로 이력서를 접수하게 되여 명실상부한 사학의 명문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였으며 자사고의 선두를 지켜왔으며 작년에는 전국에서 3번째로 서울대에 약50여명을 보내는 명문 학교가 되였다삼성을 중동재단의 인수자로 결의한 코리아나 호텔 커피숖 회동은 모교 중동의 역사를 바꾼 중동 역사의 대전환점이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 봐도 49회 안동선 국회의원 64회 김무성 민정수석 김운환 중동고 교사(50회)의 조합은 하나님이 내려 주신 한수로서 모든 동문들과 함께 새삼 감사를 드린다이렇게 일원동의 봄이 찾아오고우리 중동은 새로운 사학의 명문으로 도약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3.中東士官學校가)개포고등학교 事件강북 무교동 시절 중동은 일제에 앞장서서 저항하면서 주먹을 잘 쓰는 학교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강남시절을 맞아 중동고가 일원동으로 이전한 후에도 후배들의 활약상이 매스컴을 도배하여 중동 주먹의 전통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세간에서 확인하는 사건이 있었다어느 날 중동고 학생이 남녀공학인 개포 고등학교 여학생을 사귀다가 개포고 남학생에게 걸려 뒤지게 두들겨 맞고 학교에 돌아와서 이를 이상히 여긴 중동고 학생들이 묻자 이실직고한 후 (탈랜트 이병헌포함) 여러 명이 주동이 되여 수업시간에 연판장을 돌려 삽자루 빗자루 등을 들고 개포 고등학교에 쳐들어 가서 다 때려 부셔(선생도 두들겨 맞고 유리창도 박살)뉴스에 방영 되여 수서경찰서가 비상이 걸렸으며 주동자들이 경찰서 끌려갔는데 구속 일보 직전에 전 교사들이 구명에 나서서 구속을 면했던 사건이다(당시 6공 실세의 황태자 박철언 장관의 아들이 중동중학교 학생이라 학교에서 담임을 보내 학교가 큰 환란에 처해 졌다고 선처해 줄 것을 요청하여 안기부 수장 이였던 박철언 장관이 움직여 전원 구제 되였다는 이야기도 서정빈님 구술에 따라 바로 잡습니다 당시 박철언 장관은 지금 백강수 회장이 심복이였습니다)나) 와세다 스토리(48회 장충준과 신도환의 義理)48회 장충준 (일명 와세다)선배가 동국대를 들어가서 총학생회장을 하면서 전국 대학생 총회장도 선거를 하게 되었는데 과잉열기로 경북 대구대 계명대 등 이승만 대통령의 심복인 신도환이 반공청년단장을 할 때(신도환은 일본 천황배 유도대회에서 최우승, 현재 안기부 같은 역할) 반공청년단원들은 그 신도환의 후배들로 유도로 단련된 어깨들로 구성되어 있다4,19직전 전국 대학생 총회장선거 유세에서 신도환의 경호원으로 유도를 한 경북 학생들이 그릴에 앉아 있었는 데 전국 총학생회장 유세로 중동고 출신들과 전국대학생연맹 학생들이 각구목으로 목을 내리쳐 신도환 측 경호원들이 많이 다쳤고 이로 인해 화가 난 신도환에 의해 전원 구속 수감된 것을 당시 식자층이던 와세다의 모친은 (이화여전을 졸업하고)날마다 신도환의 집을 방문 “우리아들은 깡패가 아니고 효자이다 용서해 달라” 간청하여 감동받은 신도환은(신도환은 당시 엄청난 효자) 장충준을 석방시켜 주어 서로 인연이 되었다이듬해 4.19가 나자 전국의 데모대, 특히 성난 학생들이 신도환의 집을 에워싸고 위해를 가하려 하자 전국 대학생 연맹 장충준이(중동 48회 일명 와세다) 가로 막으며 강력히 설득 하자 신도환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결국 의리를 지킨 장충준은 후배들의 우상으로 안타갑게 국회의원을 한 후 교통사고로 命을 달리함 (51회서정빈의 오야봉,서정빈 녹취에 생생히 구술)장충준은 동국대총학생회장 전국대학생연맹총회장 신도환의원의 최측근으로 김대중 대선 시 경호실장을 역임(48회 장충준의 천거로 53회 한광옥이 신도환의 비서가 됨)장충준이 동국대 총학생회장 선거 시 상대방 후보(경기고 출신)를 의협심이 강한 49회 김진환 (일명 빨지산)이 납치 장충준이 단독 후보로 당선되었다다) 외국어 대학을 접수하다서정빈은 외국어대 중어중문학과를 입학한 후 교내에 재단과 관련 스트라이크가 연일 이여지게 되자 심지어 교수들까지 양분 되여 갈등이 심화 고조 되었을 때 당시 중동고 출신들이 (총 16명이였고 5명 정도가 좀 싸움을 하였던 깡다구 좋은 사람들) 재단을 구하겠다고 재단 편에 서서 활동하였는데어느 날 큰 싸움이 이어지고 재단 측이 밀려 옥상까지 후퇴하였는데 마지막에 동원된 경찰에도 아랑 곳 하지 않고 몰매 (다구리)를 맞아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한 후 날마다 (식칼을 들고) 반대파를 한명씩 방문 겁을 준 것이 먹혀 교내를 통일 평정하게 된 후 외국어대는 물론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되였는데이때부터 총학생 회장을 하려면 교내의 좌상인 서정빈에게 와서 허락을 받고 출마하면 전부 당선 되였던 이른바 학생 대통령으로 중동사관학교 출신이라는 말을 듣게 되였다(중동사관학교의 연혁은 서정빈의 오야붕인 48회 장충준 때 부터 확인)이후 8년간 수학하면서 장학금을 받은 것도 아닌데 교무처에서 등록금을 대납 학생증을 보내왔고 각종 행사 또한 구두로 허락을 받아 했었다목포 삼학소주 아들이 총학생 회장을 출마하려고 그 부모님이 정빈이형을 찾아와 만나고 좋은데 가서 식사 대접 하고 대우하여 결국 당선 되었고 또 학생 불만 데모가 일어나면 정빈이형이 그만 하라고 하면 스톱 되는 현상이 생기고 이를 재단에서 각종 행사 때 오히려 부탁하는 일들이 8년이 지속 되여 외국어대학에서는 숨은 실력자(王(임금))로 통했다 고 한다 당시 재단이사장 친동생이 재단의 전무이사인데 불러 촌지를 평상시에도 주었으며 외국어 대학 제1회 총학생 회장이 정빈이 형의 도움으로 당선 되였다재단이사장이 정빈이형을 불러 누굴 찾아가라고 하면 상당한 대우와 수북한 자금을 받아와 인맥들에게 나눠주곤 했다고 한다 아울러 58회 강덕영이 외국어 대학 총동문회장을 할 때 경동고등학교출신들이 훼방을 놓자 점잖은 강덕영은 곤란한 지경에 처했을 때 61회송영소(전 중동고 총동문회장)가 찾아와 설명하여 서정빈이 출동하자 전부 자리를 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회현동 호텔내애서)논산훈련소에 입대 하자 학생회장을 선거에서 도와 주어 학생회장이된 정홍과 7명이 단체 면회와서 이를 알게 된 외국어대 2년 선배인 박중권의(논산훈련소 소장 비서실 근무) 도움으로 특무대(대장 김창룡이 총맞어 죽자 방첩대로 이름이 바뀜)외사과에서 만기전역 하였다YMCA호텔 49회 오문환이(외국어 서반어과) 총지배인을 할때 중동 후배 53회 이**가 노조를 설립하려고 하자 총지배인 오문환의(49회) 부탁으로 이**를(중동 53회 외국어대 영어과)만나 중동 출신들끼리 단결을 위해 무산시켰다4. 마감하며일요일마다 51회 12명이 가까운 산을 찾는데 끝나기가 무섭게 예수소망교회를 온 것이 20여 차례이고 간증을 한 번도 빠짐없이 들은 것만도 12회이며 중동고 신우회모임을 비롯하여 교회에 다닌 것만도 5년간 4,50번이 되다 보니 이제 제법 교회 문화에 익숙해졌다사실 작년에 백강수회장이 간증을 요청했을 때 나완 거리가 먼 행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 년이 지나면서 생각에 변화가 왔고 간증행사에 선 일만 해도 하나님의 인도라 생각 한다앞으로도 시간이 허락하는 한 중동 신우회 모임에도 참석하고 여기 중동 사랑방에서 하는 여러 행사에도 참석하도록 하겠다특히 백강수회장이 주도하는 아프리카 우물 파는 일이라든지 53회 이현수 후배가 우간다를 찾아 도와주는 일이라든지 59회 문홍량 후배가 이디오피아를 도우는 일이라든지 중동 동문들이 아프리카와 전 세계 어려운 나라를 다니며 도우는 일들도 매우 보람되고 감동적인 일이며 중동 동문으로서 자랑스럽게 생각 한다이러한 선행들은 중동 후배들에게도 좋은 교훈이 된다고 보며 중동 사회 전체가 알아야 하고 동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앞으로도 이 교회에서 열리는 후배들의 신우회 모임, 사랑방모임에는 빠지지 않고 참여하면서 그들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나도 더욱 가까이 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다■편집 또는 대필 후기가).중동의 싼타크로스들의 도원의 결의49회 안동선 국회의원 64회 김무성 사정수석 51회 서정빈 총동문회 사무총장 50회 김운환(중동고 교사) 이 네 분은 꺼져가는 등불을 살린 중동의 건아로 마치 인천상륙작전에서 월미도의 등대를 점화하는 작전을 목숨을 걸고 수행했던 전우들의 노력의 댓가로 맥아다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드라매틱한 서사시이며정주영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하는 감동어린 황홀한 감동을(6만여 동문들의 환호와 한숨 학부형과 학생들의 안도 땅을 치며 불안으로 깊은 안도를 하셨던 선생님들에게도 희망을 주었던) 선사한 극적인 장면으로네 분에게 경의를 표 합니다나).중동의 제갈공명 (49회 안동선)49회 빨지산 김진환 등 동기들과 와세다 등 일부세력이 총동문회가 44회 김동진 회장을 (이정재때 을지로 오야붕) 설득 다시 하나로 합치고 총동문회를 하나로 만든 귀재부도난 학교를 삼성으로 재단을 51회 서정빈 64회 김무성 50회 김운환교사 함께 넘긴 구교의 열사들다).중동의 관운장 51회 서정빈동문 6만명 中 절반이 알고 있고 52회 한영택 중앙정보부 차장의 증언에 의하면 아래.위로 10년은 먹어 준다고 하며 양일동 의원에게도 인정을 받았고 의리와 애교심의 달인 외국어대를 접수 권불십년을 향유한 서정빈은 대한민국 최초로 덕수궁 석조전 앞뜰에서 결혼식을 올린 뉴스의 사나이로 외대 학장이 주례를 보고 총장이 하객으로 참석하는 등 中東人의 전형라).하늘이 내린 싼타클로스 64회 김무성 국회의원학교를 구한 불세출의 영웅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마) 모사는 사람이 이루고 성사는 하늘이 이룬다고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여 13명의 간증으로 꺼져 가는 소망교회에 희망을, 240명의 신우회 천사들에게 사명을 선사한64회 백강수 장로내가 본 몇 안 되는 살아 있는 성령이 충만한 長老이런 분들이 있어 이 나라가 이 학교가 이 교회가 이 사회가 지탱 하고 있다는 새로운 느낌이 편집 또는 대필 후기이다■ 한줄 證言*가까이 지냈던 동문들46회 이우재 (육사13기.한국사격연맹회장. 48회 장충준(일명 와세다) 42회 최영덕(종로경찰서장, 해양경찰대장) 양일동(국회의원) 49회 안동선(총동문회장,3선국회의원) 55회 이재신 수원지방검찰청 검사장*이런 이유로 48회 전후로 중동을 깡패학교라고 부르지 않고 사관학교라고 부른 이유는 선,후배 관계가 엄격해서이다 깡패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약간의 컴플렉스적이며 이미 나라를 잃은 왜정시대 때부터 학교가 시내 중심에 있었고 이 학교를 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선지자들이며 나라 잃은 울분을 애교심과 애국심으로 일본 학생들과의 잦은 충돌로 똘똘 뭉친 의협심이 강한 유별난 학생들 때문이라는 것이 51회서정빈 선배의 이야기이고 편집자도 이에 동의 한다*엄격한 선,후배 관계, 투철한 상부상조 정신70회 이태제가 찾아와 처남이 결혼식 날짜를 받고 구속 되였는데 도와 달라고 요청하여 당시 수원지검장으로 있던 55회 이재신 검사장에게 찾아가 부탁하자 다음날 석방되었고 아울러70회 심규섭은 국회의원이 된 후 전화가 와서 출판기념회와 후원의 밤을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열었는데 인원이 부족하여 충원 요청을 받고 도와 준 적이 있었으며 또 평택에 대학교를 만들려고 노력하던 중 허가조건에 토지를 80%이상 매입해야 교육부에 허가 신청을 할 수 있는데 2년 동안 토지매입을 하지 못하자 서정빈에게 연락이 와서 도와 달라고 부탁 하길래 55회 경기도 부지사인 임수복에게(연대행정학과) 찾아가서 사정이야기 하자 “노력해보겠다” 말하였는데 당시 이인제가 도지사 되자 김영삼은 도지사 그만두고 대통령 선거에 나가라고 하여 이인제가 경기도지사 직을 그만두어 임수복은 경기도 도지사 대행을 맡았으며 이 부탁을 적극적으로 노력해 주어 70회 심규섭이 평택 대학교를 동부건설에서 짓고 개교 하게 되었는데 나이 먹어 지금 새삼 생각해 보면 中東이라서 가능 했던 일 이였던 것 같다 어찌 다 이야기하고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선,후배 관계만 엄격한 것이 아니라 상부상조의 정신도 투철했던 것 같았다*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일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 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장9)(雉崗書)
498개의 글
- 구독자: 2명
글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 |
---|---|---|---|---|
498 | 오형택(오형탁)(68) | 24.12.14 | 172 | |
497 | 총동문회 관리자(82) | 24.11.26 | 304 | |
496 | 총동문회 관리자(82) | 24.11.21 | 248 | |
495 | 총동문회 관리자(82) | 24.11.12 | 171 | |
494 | 총동문회 관리자(82) | 24.11.04 | 429 | |
493 | 총동문회 관리자(82) | 24.10.07 | 242 | |
492 | 김종진(70) | 24.09.26 | 87 | |
491 | 김종진(70) | 24.09.26 | 84 | |
490 | 총동문회 관리자(82) | 24.08.20 | 130 | |
489 | 오형택(오형탁)(68) | 24.07.23 | 882 |
2024.9.29 오후 1시30분
안내 70회 김종진(01072578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