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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탐방 ㉒ - ‘한국 불교계의 존경받는 지도자’ 송월주 동문(47회)

  • 오형택(오형탁)(68)
  • 2016-12-14 23:58:48
  • 조회 8,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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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학 : 이렇게 뵙게 되어 기쁩니다. 큰스님 俗名이 宋眩燮(송현섭)이시지요? 그런데 ‘현(眩)’자는 ‘어지럽다’는 뜻으로 이름에는 잘 안 쓰는 한자인데요....

송월주 : 속명은 眩燮 맞습니다. 원래 ‘현’자가 날日변에 검을玄인데, 눈目변으로 되어 있습니다. 호적 올릴 때 잘못 됐는데 그냥 사용합니다.

 

이명학 : 월주(月珠)라는 법명은 어느 분이 지어주셨나요?

송월주 : 봉은사, 화엄사, 법주사 주지를 지내신 정금오 스님(1896~1968)이 지어주셨습니다. ‘금오’는 쇠‘金’ 까마귀‘烏’자인데 황금까마귀란 뜻으로 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 은사십니다. 법호 ‘태공(太空)’도 지어주셨습니다.

 

 

이명학 : 중동에는 어떻게 입학하게 되셨나요?

송월주 : 시골에서 산외국민학교를 나오고 전주북중학교 시험을 봤다가 떨어졌어요. 당시 형님이 수송전기학교 역사 선생이었어요. 성함이 송문섭인데 중동에서도 역사 선생을 하셨지요. 중동 출신(36회)이세요. 중동은 조은택씨가 교감이고, 수송은 최우동씨가 교감이었어요. 당시 중동교장은 서울대학교 초대총장을 지낸 백농 최규동선생님이었어요. 최규동선생님은 당시 철저한 검증과정을 거쳐 초대총장이 되었습니다. 백농선생 후임으로 중동 교장을 하신 분이 조은택 선생님, 그리고 최우동씨는 최규동 선생님의 동생입니다. 아무튼 전주북중학교를 떨어져서 몇 달을 쉬었다가 1학기 초에 중동학교로 편입학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농지개혁 등의 이유로 가산이 기울기는 했지만 월반(越班)할 정도로 성적이 괜찮았던 막내아들의 총기를 그냥 썩히기는 아까웠던 것 같았습니다.

 

이명학 : 당시 중동은 6년제였는데 졸업은 하지 못하셨죠?

송월주 : 1948년 입학당시 중동학교는 6년제였고 6.25 후 중학교, 고등학교로 분리되었죠. 중동을 그대로 다녔으면 1954년도 졸업이고 고등학교 2회 졸업(47회)이 됩니다. 3년 동안 중동을 다니다가 맏형님이 고향인 정읍에서 국회의원에 출마를 해서 형님 선거를 도와주러 내려가게 됐습니다. 그 때가 5.30선거(제2대 총선/1950.5.30)인가 그럴 거예요. 형님은 낙선 후 곧바로 서울 냉천동 집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그대로 고향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고향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아마 5남 4녀 중 막내아들이었기 때문에 부모님 곁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6.25 전쟁이 터져서 못 올라왔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집안 형편은 더 어려워졌고 난리를 겪은 부모님은 서울로 보내는 것을 불안하게 여기셨지요. 그래서 집에서 가까운 정읍농림고로 진학하게 된 겁니다. 당시엔 농림학교였는데 후에 이름을 바꿨죠. 대학 진학 때문에 2003년 농림학교에서 인문계인 정읍제일고등학교로 바뀌었어요.

 

이명학 : 중동에서 명예 졸업장을 받으셨지요?

송월주 : 생각도 안했는데 김무성과 안동선 동문(49회)이 중동고등학교 명예졸업장을 준다고 했습니다. 경기도 부지사를 지낸 임수복(55회)이 내 이름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면서 명예졸업장을 준다고 오라고 했는데 제가 안 간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제가 나이도 먹고 해서요. 그래도 승낙을 하라고 해서 승낙을 했어요. 그 졸업장을 그 분들이 가져온다고 했는데,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제가 일일교사처럼 와서 출석을 하고 졸업장을 받아달라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나니까 또 거절하기가 어려워서 갔어요. 일원동으로 옮긴 학교로 갔는데 가보니까 대령 계급장을 단 군인도 있고, 기업체 사장도 있고 그러더라고요. 늦게나마 명예졸업장을 받아 어엿한 중동의 일원이 되었지요. 8명이 함께 받았는데 직접 가서 받기를 잘한 것 같아요. 가끔 중동회보도 보내주고 그러더라고요. 동창모임도 오라고 했는데 못 갔어요. 한 번 총동문회 모임이 있어서 갔어요. 총무원장 할 때였는데, 한광옥(53회)도 있고 김무성도 있고 명사들이 많이 왔더라고요. 그 때 한 번 갔었는데 그 이후에 동기동창들 모임이 있다고 했는데 못 갔어요. 왜냐하면 제가 산에 사니까 음식도 가려 먹고 조금 불편할 것 같더라고요. 회비를 내겠다고 했는데 안 받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여기로 초청을 해서 음식을 대접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명학 : 중동 다니실 때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가요?

송월주 : 중동 시절 추억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일제에 항거한 민족자주 정신의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학교 분위기가 또렷하고요. 꿈 많은 소년시절의 추억과 경험은 지금까지 좋은 자양분이 되었어요. 조계사에 있던 시절 건너편 중동 후배들을 바라보며 흐믓한 미소를 짓기도 했고요. 3년간의 중동학교 생활이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학교가 문화, 경제, 정치 이런 것들의 중심지인 서울 한복판인 수송동에 있었기 때문에 시골에서 학교를 나왔다면 경험할 수 없었던 것들을 겪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서울에 와 있었던 그 때가 굉장히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기였습니다. 명동 시공관(現명동예술극장)에서 김생려 시립교향악단 연주, 모윤숙, 중앙대학교 총장을 지낸 임영신 등이 하는 문화강연을 들으며 3년 동안 문화적인 습득을 하였지요. 시골에서는 접해 볼 수 없는 거죠. 문화적 충전을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동양극장(최초 연극전용극장)은 냉천동에서 걸어서 학교에 오다가다 연극 관람을 하였고, 을지극장(파라마운트)에서 외화도 많이 보았고, 유관순, 이순신장군, 사육신, 김구선생 연극 같은 거 하여튼 문화적 흡수와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또 중동은 축구를 잘하기도 했고, 또 당시에 이교선(19회), 양일동(27회)과 같은 좋은 선배들을 많이 배출해서 유명했습니다. 선생님들도 자랑스럽게 말씀하시고 그랬지요. 중동 출신이 사회적인 명사가 많다고 들어서 긍지도 가졌습니다. 운동 잘하는, 축구 잘하는 걸로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명학 : 사회에서 중동 동문을 만나신 적은 있었나요?

송월주 : 내가 총무원장을 하고 있을 때 국립공원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었습니다. 김무성 동문이 당시 내무부 차관으로 당연직 위원장이었고요. 저는 불교 관련된 걸 해결하기 위해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국립공원 내 시설, 건물을 지을 때는 국립공원위원회를 거쳐야 해요. 그 때 모임에서 경기도 부지사였던 임수복 동문(55회)이 중동 후배라면서 내 얘기를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굉장히 반갑게 저를 대해줘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게 1998년일 겁니다.

 

이명학 : 동기 분들 중에 지금도 만나시는 분이 계신가요?

송월주 : 조교용이라고 있습니다. 중동학교 동기생인데 6.25가 나서 고향으로 피난 가서 전주고를 나왔어요. 그리고 중앙대학교 법대를 나오고, 지금까지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 지역인지.. 법무사 회장도 하고 후에 전국 법무사회 부회장도 하고 그랬다던가.

중동 재학 시절 앞뒤에 앉아서 친했습니다. 조정기는 미국에 갔는데 돌아갔고, 또 몇 사람이 있는데 오규석이라고 중동 다니다가 나중에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연세대학교를 나왔는데 아직 살아있다고 들었습니다. 반장을 했어요. 그 외에는 교류가 전혀 없어요.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로는 이범주라고, 80년도 총무원장으로 있는데 제가 신문에 나오니까 찾아왔었어요. 이범주 집에서 형님하고 저하고 하숙했는데, 경복고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명학 : 기억에 남는 은사님 계세요?

송월주 : 조은택 선생님이 기억에 남습니다. 최규동 선생님 사위로 기억이 납니다. 또 다른 선생님들은 생각을 하면 기억이 날 것 같습니다.

 

이명학 : 백농선생 사위 분이 국어 선생님으로 계셨는데요.

송월주 : 성함이 어떻게 되죠? 박태화선생님 아닌가요?

 

이명학 : 홍만식 선생님입니다. 조은택 선생님은 어떻게 오래 기억을 하고 계신건가요?

송월주 : 교장선생님 대리로 조회 때마다 단장 올라가 훈화를 해주셔서 기억을 오래 합니다.

 

이명학 : 선배님께 특별히 잘 해주시거나 한 건 아닌가요?

송월주 : 저와 인연이 생긴 건 제가 6년 동안 동국대학교 이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분이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계셔서 만나게 됐죠. 형님과 제가 중동을 나왔다고 해서 형님도 잘 아시고 해서 그 때부터 친밀해졌습니다. 선생님은 범어사 승려셨습니다.

 

이명학 : 조은택 선생님께서 1951년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해인사 내에 중동중학교 분교를 만드셨고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셨습니다. 54년에 해인중학교로 교명이 바뀌었죠. 이사장은 최범술이라고 국민대학관(국민대학교와 경남대학교의 전신)을 만드신 분과 함께 했다고 들었습니다. 최범술은 해인사 주지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송월주 : 해인대학도 만든건가요?

이명학 : 네. 국민대학관이 해인대학, 경남대학교로 교명이 바뀌었습니다. 출가하시게 된 동기가 있나요?

송월주 : 6.25 후 우리나라가 초토화되고 쑥대밭이 됐습니다. 서울에 있을 때 형님이 냉천동에 한옥을 사서 고학생, 형님 제자, 지방에 연구하는 후배들까지 열 명 정도 데리고 자취도 했습니다. 저도 중동을 다닐 때 거기 있었거든요. 그 이후에는 효자동에 집을 얻어서 살았지요. 그 와중에 폭격을 받아서 초토화됐습니다. 집이 시멘트가 부서진 상태로 복구도 못하고 정말 참혹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 해외, 일본에서 징병, 징용 갔던 사람들 배타고 들어오지.. 서울이 말할 수도 없이 전쟁의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또 자유당과 민주당 여야 간의 갈등도 많았습니다. 나라가 대내외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자신의 재산이나 농토가 있는 사람들은 좀 살만 했겠지만 그게 없는 사람들은 초근목피로 근근이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형님이 추천해주셔서 서울농업초급대학(現서울시립대학교)에 들어갔어요. 초대학장이 중동출신인 이휘재박사(17회)였습니다. 거길 1학기만 다니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그 때가 휴전된 후인데, 정부가 부산으로 갔다가 다시 환도했습니다. 서울농업초급대학에 진학한 후 본 서울은 참상 그 자체였다. 북한과 대치상태로 예민한 상태였기 때문에 군인들은 7년까지도 군복무를 하기도 했습니다. 정치도 여야가 대립하고,,, 한마디로 시련의 시대였습니다. 빈부 격차는 말할 것도 없고, 건설 등 모든 것을 원조를 받아서 살 때였습니다.

마침 당시에 김혜정 스님이라고, 조계사에 있던 국민학교 동창인 스님 소식을 오랜만에 듣게 됐습니다. 조계사 근처의 빨간 벽돌집에서 일종의 문화강좌를 하는데 제가 그걸 들으러 다니다가 만나게 된 겁니다. 그 때 그 분이 승려가 된 지 1~2년 정도 됐다고 했습니다. 김혜정 스님과 제 인연을 말하자면, 스님이 저보다 두 살이 더 많은데, 국민학교 1학년부터 4학년까지 계속 반장을 할 정도로 재주도 있고,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 했고요. 제가 4학년까지 다니다가 6학년으로 월반을 했습니다. 나보다 한 살 더 먹은 조카가 5학년에 전주농림학교를 들어간 걸 보고 부럽기도 하고 경쟁심이 생겨서 월반하겠다고 하면서, 반에서 8명이 같이 월반을 했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50명 중에 10등 안에 들었던 사람들이 전부 다 월반을 했습니다. 그 때 같이 월반한 친구 중 한명이 혜정스님입니다. 그 이후에 저는 중동을 다니고, 그 친구는 철도학교를 다니면서 헤어지게 됐죠. 그 후 6.25 때 전주에 내려가서 신흥고등학교를 다닌다고 알고 있었는데 딱히 교류는 없었고, 그러다 조계사에서 다시 만나게 된 거죠. 당시에 편지도 주고받고 했습니다. 저는 혼란스러운 시국에 통일문제와 국가의 안정과 발전에 대해 편지를 썼고 그 친구는 제게 수행의 도를 깨달아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때 조계사에서 만난 이후에 함께 배를 타고 보문사에 갔습니다. 함께 살아온 이야기, 학창생활, 어렵게 살아온 이야기 등 세상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혜정스님은 법주사로 가게 되고 저는 서울에 남아 편지만 주고받았는데 제가 법주사로 간다는 편지를 하고 법주사로 향했습니다. 기차를 타고 대전에서 내려서 다시 버스를 타고 법주사까지 가는 길가 풍경들이 너무 좋았습니다. 차창으로 보는 강(지금은 대청호)도 너무 좋았고 꼬불꼬불 12굽이 말티재에서 바라본 속리산은 숲이 우거지고 기암괴석인데 산이 흙색이 아니라 금강산처럼 바위가 하얗고 오색찬란한 나무가 많았습니다.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가는 법주사 입구의 5리숲길은 하늘을 향해 치솟은 나무들의 자태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남북간 대결이 격심해지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혼란스럽고 갈등이 많았던 투쟁의 시기이고 빈부의 격차가 심하고 초근목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기인데 한 달 동안 생활을 하면서 스님들의 대화와 생활하는 모습을 보니까 거기에는 시련과 갈등과 분쟁이 없어 보였고 모두 친절하고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승려 생활을 통해 혼란을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내무를 보시던 최월산 스님에게 승려가 되겠다고 하였고 승낙을 받아 금오스님의 제자가 된 거죠.

   

이명학 : 불교계에 동문들이 좀 있습니까?

송월주 : 좀 있더라고요. 기억은 잘 안 나는데 더러 있는 걸로 압니다.

 

이명학 : 큰스님께서 1980년대 법난 때 총무원장을 맡으셨지요... 그 후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신 동기가 있으셨나요?

송월주 : 제가 최근에 책을 냈어요.(토끼뿔 거북털) 법난에 대한 이야기가 이안에 다 있습니다. 자료집으로 참고하세요.

 

 

평소에 나라를 위해 힘을 쓰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정치,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사서삼경 중 주역을 제외한 사서이경에 달통하셨고 낙운성시(落韻成詩:한사람이 시의 안작(內聯)을 읊으면 상대는 즉시 대구(對句;外聯)를 격에 맞게 읊어야 하는 시풍)를 하실 정도로 시작(詩作)에도 능통하셨고 비문에도 조예가 깊으셨던 아버지(송영조)와 정치를 하시던 두 분 형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신문도 많이 봤습니다. 학교에선 민주교육도 배웠고요.

대처승제도라고 총독부에서 권장해서 만든 제도가 있습니다. 왜색

불교를 정리하고 수행승단 회복을 해야 한다고 일종의 정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에 협조를 했습니다. 또 나중에는 동국대학교 이사, 총무부장 등을 하며 교육제도, 시스템을 바꾸는 일도 했습니다. 그렇게 수행하면서 정화하고, 정화하는 과정에서 종단의 종무행정을 맡았습니다. 그렇게 정화와 수행, 종단 질서를 잡는 종단수호 교권수호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과정에서 만 27세에 전라북도 총무원장 겸 금산사 주지를 맡았고 그 후 20년 만에 17대 총무원장을 46세에 맡았습니다. 1980년 당시 광주사태가 터지고 신군부가 정권을 잡을 때였습니다. 저보고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합니다’는 내용으로 조계종 총무원장 이름으로 성명서를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당시는 천주교와 저만 안 했습니다. 기독교를 포함한 거의 모든 단체들이 언론에 지지성명서를 냈지만 저는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과거 역대 조계종 원장님들이 종정중심제를 지지를 했지만 교무부장 시절에 그걸 보면서 내가 원장이 된다면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총무원장 중심제를 밀었고 종정중심제의 폐단을 없애자고 했습니다. 우리가 5대 종회인데 그럼 6대 종회를 만들자고 합의를 해서 총무원장 중심제를 만들어서 제가 원장이 되어서 조계사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그 결과 주도권을 뺏긴 사람들이 의도대로 일이 안 되니까 국보위에 투서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제가 총무원장이 됐는데 그 사람들이 계속 항의를 했어요. 그 과정에 전두환이 대통령이 됐습니다. 광주 같은 인권 탄압을 했던 곳에서는 인명 손상도 심했습니다. 정교(政敎)분리의 원칙을 내세우며 성명서를 내기 힘들다는 의견을 표명했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 ‘총무원’으로만 하고 ‘송월주’ 이름을 빼달라고 했습니다. 보안사령부에서 사람을 시켜서 세 번을 요구했으나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그 일로 서빙고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가끔 말을 할 때 함부로 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폭행을 당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것이 ‘10.27 법란’입니다.

 

 

 

그 뒤로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 전에는 일본도 한 번 갔다 왔고, 월남도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외국을 두 번 갔다 왔는데, 당시에 경제도 넉넉하지 않을 때고 맡고 있던 일들이 많아서 외국을 갈 형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2년 동안 일체 공직에 있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됐습니다. 그래서 개원사 주지 자리도 내놓고, 금산사 등 여러 관계하던 곳을 내놓고 뉴욕에 가서 있다가 유럽, 멕시코를 관광 겸해서 다녀왔습니다. 그 다음에는 일본, 그리고 동남아를 다녀왔습니다. 가는 곳마다 전부 복지 사업을 하더라고요. 미국, 일본 등 양로원, 고아원, 의료 사업, 봉사 사업, 납골당 등 돌아보며 사회활동을 하게 됐습니다. 그걸 보면서 한국불교가 기복에 젖어있고 사찰관리에 급급한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3년 동안 미국, 유럽, 멕시코, 일본,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인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홍콩, 대만을 거치면서 안목이 넓어졌습니다. 1985년 돌아온 후 경실련, 지역감정 해소 공동대표, 함께 일하는 재단, 공명선거 상임대표, 지구촌 봉사위원회, 나눔의 집 등 10 여개 단체에서 장학 이사장, 상임 대표를 맡으며 사회 참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40대 후반이었습니다. 그런 ‘깨달음 사회운동’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러다보니 제가 선도한 것처럼 됐습니다. 사실은 종단 전체가 한 것이 아니고 제가 시작한 것인데 아직도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는 멀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강원룡 목사, 송월주 이렇게 3총사처럼 지냈습니다. 강원룡 목사는 저보다 22살 김수환 추기경은 17세가 많으신 분들입니다. 다들 장형 같고 그렇죠.

 

 

이명학 : 중동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세요?

송월주 : 백농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제가 긍지를 많이 얻었어요. 중동을 세우신 정신이 정말 대단하시잖아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공헌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자기만의 신념을 가지고 학교를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고 민족교육을 하겠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긍지를 가지고 살 수 있었습니다. 올바른 교육을 받아서 인격자가 되고 좋은 지도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명학 : 선배님이 보시기에 중동은 어떤 학교 같으세요?

송월주 : 지방에서 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중동에 대해 굉장히 부럽게 생각합니다. 명문 사학 중 하나 아닙니까? 당시에 학교가 교정도 작고 그랬는데 빨간 벽돌집과 운동장도 쬐그마했죠. 축구도 다른데서 연습을 했었으니까요... 지금 중동은 넓은 운동장도 있지 않습니까. 강남으로 이사 가서 더욱 학교가 커졌더라고요. 명예 졸업장을 받으러 가서 봤는데, 백농선생 동상도 크게 세워졌더라고요. 그런 학교를 다니는 학생으로서 긍지를 가져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교가를 부를 때면 큰 긍지를 느꼈습니다. 특히 축구시합에 응원을 할 때마다 정말 큰 긍지를 느꼈습니다.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서 동대문운동장까지 걸어가서 응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기면 출석부를 안 부르고, 지면 불렀습니다. 괜히 얻어맞고 그랬습니다.(웃음) 제가 다닐 때는 ‘싸루’ 라고 주먹으로 서울을 휘어잡았습니다. ‘싸루’는 ‘원숭이’라는 일본어로 된 별명입니다. 그 사람이 앞장서서 응원단장하고 우리는 목청이 터져라 응원하고... 하여튼, 그렇게 학교가 이겼으면 좋겠다고 응원을 하고, 이기면 환호를 하고 지면 원통해 하고... 그러한 것들을 몇 차례 겪으면서 중동에 대한 애착이 생겼습니다. 대구나 부산에 원정을 가서 이기고 돌아오는 때가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한 식구 같은 걸 느끼고 애정이 있습니다. 교육이라는 건 아시다시피 지, 덕, 체이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연마하면서 훌륭한 인격자가 되고 지도자가 되어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공헌할 수 있는 전통을 이어왔고, 앞으로도 그런 학교가 되기 바랍니다.

 

이명학 : 백농 선생을 직접 뵌 적이 있으신가요?

송월주 : 네, 한번 봤어요. 휠체어 타신 모습을 봤습니다.

 

이명학 : 교정에서요?

송월주 : 네, 다리가 안 좋아서 휠체어 타고 오셨어요. 선생님들은 매일 백농 선생을 자랑하셨어요. 친일에 대한 논란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명학 : <문교의 조선>이라는 일본인이 만든 잡지가 있습니다. 거기 ‘천왕의 은혜에 보답하자’는 글을 백농선생이 쓰신 걸로 돼있는데 보니까 백농선생이 일본어를 전혀 못 하셨고 나중에 증언을 들으니 총독부가 하도 요구를 하니까 서무실에 있던 직원이 써서 준 것이라고 밝혀졌습니다. 서울대학교 총장 임명 때도 그 문제가 됐었는데 당시 반민특위에서도 문제를 안 삼은 건인데, 오마이뉴스 기자가 어디서 찾아내서 이슈가 됐던 겁니다.

 

송월주 : 중동에서 성명도 내고 광고도 냈던데

이명학 : 적극적으로 해명을 해서 해결이 됐습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 있는 동문들도 성금을 보내줘서 광고도 내고 그랬습니다.

 

 

송월주 : 잘 되었네요. 그 분이 있었기 때문에 중동이 유명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배출된 겁니다. 양일동(27회), 이교선(19회), 안동선(49회), 안호상(특), 김지하(52회), 한광옥(53회), 삼성을 세운 이병철(26회)까지. 그런 사람들을 내세우면서 긍지를 갖지 않습니까. 예전의 벽돌건물과 작은 운동장에 비교하면 학교도 정말 시설도 좋아졌고요. 서울대학교 진학률도 높고요. 예전에는 축구 잘하고 깡패학교라 평이 나있었지만... 예전의 그 정신을 이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명학 : 장시간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2016. 12. 7>

 

<우:이명학(67회) 좌:김진규 사무총장(75회)>

 

<좌:변재곤 간사(77회)>

 

 

http://www.woljoo.com/life/life.asp ☜클릭하세요[송월주 큰스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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