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탐방 ㉑ - ‘부드러운 카리스마’ 장영섭(60회) 동문

 

 

이명학 : 오랜만에 뵙습니다. 중동은 어떻게 입학하게 되셨나요?

장영섭 : 그거야 당연히 1차 떨어져서 가게 됐죠.(웃음) 제가 용산중학교를 나왔어요. 중학교 때는 주로 만화방에서 만화만 보고 공부는 제대로 하지 않았죠. 당시 강화도에서 서울로 와서 누상동(인왕산 밑, 배화여고 뒤)에서 살았는데 근처 청운동 쪽에 경복고등학교가 있잖아요. 경복고를 가려했지만 떨어지고 보니까 2차로는 중동 외에 갈 데가 없었어요. 2차 중 가장 좋은 학교가 중동 그 다음이 삼선고(1971년 ‘삼선중학교’로 변경) 정도였죠. 당시에는 중앙도 1차였어요. 일류로 손꼽혔던 경기와 서울고에서 떨어진 학생들이 대부분 중동으로 몰렸는데 그들 틈에서 운 좋게 합격해 들어온 셈이죠.

 

이명학 : 그 당시 분위기는 어떠했는지요?

장영섭 : 지망했던 학교에서 떨어진 후 입학했으니 1학년 초반에는 약간 가라앉은 분위기도 있었지만, 곧 새로운 친구들과 사귀게 되어 활기를 되찾았다고나 할까.... 나중에도 말씀드리겠지만 중동에 들어온 것은 내 삶에 있어서 굉장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명학 :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장영섭 : 하버드대학에서 75년 동안 ‘인간의 행복’에 대해 추적해 발표한 논문이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이라는 건 명예·부·성공에서 오는 게 아니라 친구와 가족, 이런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출발한다는 내용입니다. 제 삶에 있어서 50년 동안 중동고에서 이루어진 우정, 중동동문회에 관여하면서, 또 백농포럼을 하면서 주변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 같은 것들이 제 삶을 그런 측면에서 풍요롭고 원활하게 한 원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동고 1학년 때 앞자리, 옆자리에 앉은 친구들이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친하잖아요.

 

이명학 : 동기 중에 유명한 분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장영섭 : 많죠. 고등학교 3학년 때 사직동 가는 길 쪽에 사설 독서실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우리은행 부행장이었던 정태웅, 세브란스병원 부원장을 역임하고 지금은 차병원에 있는 전재윤 이런 친구들과 대학입시 공부를 같이 했어요. 그 독서실에서 매일 저녁 열심히 공부를 해서 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죠. 정태웅은 서울상대에 들어갔고, 유홍준은 서울문리대 미학과, 나는 서울문리대 외교학과, 전재윤은 연대 의대에 합격했어요. 전재윤은 간(肝)에 관해서는 대한민국 명의에요. 연대 의대 교수 은퇴 후 차병원에 스카웃 돼서 갔는데 유명한 의사죠. 지난 번에 제가 전립선비대증 수술로 차병원에 갔는데, 전재윤이 병실에 문병와서 간호사한테 이렇게 농담도 했어요. “옛날에 독서실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했던 친구들은 다 서울대 갔는데 나만 연대를 갔어....” 또 재밌는 얘기를 하자면, 우리은행 부행장 했던 정태웅은 나하고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경기중학교 출신으로 누상동쪽 같은 동네에 살았어요. 매일 등하교를 같이 하면서 1학년 때 너무 친해진 거예요. 그래서 그 친구가 저한테 “야 우리는 3년 내내 같은 반 하자” 이랬는데, 2학년 때 다른 반에 배정됐어요. 나는 5반이고, 걔는 6반. 그러니까 6반 담임 선생님한테 “나는 장영섭이 하고 같은 반을 하고 싶다” 그래서 걔를 5반으로 옮겨줬어요. 그렇게 3년을 같이 다녔어요.(웃음)

서울대를 들어갈 때도 3학년 5반에서 공부한 장두환과 외교학과에 같이 합격했죠. 장두환 사장은 돈 벌어서 <역사비평>이란 계간지도 내고 좋은 일을 많이 한 친구인데 서울에서 국회의원 출마했다가 낙선했어요. 정치개혁을 위해서는 이런 사람이 정계에 진출했어야 했는데 안타까운 일이죠. 장사장은 제가 결혼한 뒤 대광아파트라는 안암동 쪽 아파트에 살 때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살고. 평생, 50년 지기죠.

 

이명학 : 서울대 외교학과에 가셨으면 외교관을 꿈꾸신 게 아니었나요? 어떻게 언론계에 가게 되셨는지요?

장영섭 : 대학 진학 당시에는 외교관이 되고 싶었죠. 친구들은 상당수가 외교관이 됐어요.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임성준, 노무현 때 청와대 외교보좌관 했던 정우성, 정세현 통일부장관, 김형오 국회의장 등이 다 외교학과 동기에요. 나는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삼촌이 월북한 거로 돼있었어요. 분단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인데, 제 아버님은 강화 길상면에서 소방대장을 했어요. 인민군에 붙잡혀서 조사를 받다가 이러다 죽겠다 싶어 유리창을 깨고 탈주를 했는데 이때 인민군 하나가 권총을 쏘았지만 불발이 된 모양이에요. 그래서 낮에는 보리밭에 숨어서 모친이 몰래 전달해주는 음식으로 살아났다고 들었습니다. 그 당시 선친께서 돌아가셨다면 1949년생인 저는 학교도 못 다녔고 어렵게 살았을 거예요. 아무튼 당시에는 연좌제가 있었기 때문에 삼촌의 월북문제로 외교관시험을 봐도 합격할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어요. 그래서 외무고시 준비를 하다가 그만 두고 처음에는 유학을 가볼까 생각했죠. 책을 읽다보니 파리에서 가난한 예술가나 사상가들이 다락방 같은 곳에 살면서 공부하고 이런 것들이 너무 멋져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파리에 가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돈이 없으니 국비 장학생에 선발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당시 합동통신과 동양통신이 있었는데 통신사 외신부에 들어가면 새벽 6시에 나가서 서너 시간만 근무하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퇴근 후에 유학준비를 하자. 그래서 동양통신에 들어간 것이 평생 언론인으로 살게 된 거죠.

 

이명학 : 그 때 선배님들이 언론계에 많이 계셨잖아요.

장영섭 : 박기정 선배(53회)도 계시고.. 제가 연합통신(1998년 연합뉴스로 사명 변경) 워싱턴 특파원을 하고 돌아와서 정치부장과 수도권 취재본부장을 맡고 있었을 때인데.... 그 때 대한민국 언론계를 중동 출신이 꽉 잡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요. 박기정 선배가 동아일보 편집국장, 故박무 선배(56회)가 한국일보 편집국장, 유병필 선배(57회)가 매일경제 MBN 보도국장, 박명훈 후배(62회)가 경향신문 편집국장이었고, 좀 있다가 제가 연합뉴스 편집국장을 맡았으니까요.

제가 애석하게 생각하는 건, 박무 선배입니다. 박선배가 한국일보 편집국장을 그만둔 뒤 ‘머니투데이’를 창업하고 그 후 ‘뉴시스’도 인수를 했죠. 머니투데이가 당시 광화문 동아일보 뒷 편 빌딩에 있었는데 박선배는 중동 언론인들을 위한 사랑방을 광화문 쪽에 만들어주겠다고 말하곤 했죠. 근데 박선배의 문제가 뭐냐 하면, 평생 건강진단을 한 번도 안 받은 거예요. 그러다 폐암에 걸리셨죠. 그래서 제가 머니투데이는 후배들한테 넘기고 형님은 산에 가서 건강관리 좀 하시라고 했더니, 지금 새로 인수한 뉴시스를 정상궤도로 올려놓아야 할 시점이다. 맡길 후배도 없다. 이러시는 거예요. 그러고는 저보고 뉴시스를 맡아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말하시더군요. 제가 당시에 연합뉴스 사장인데 그걸 맡을 수 있었겠어요? 아무튼 박무 선배가 한국일보 편집국장을 할 때 일본인지 중국인지 외국의 쌍끌이 어선들이 우리나라 고기를 싹 쓸어 간다고 특종기사를 썼어요. 그래서 박무 선배가 ‘쌍끌이폭탄주’의 창시자가 됐어요.(웃음) 같이 만나면 그 쌍끌이폭탄주를 두 잔 연달아 마시고 그 다음에 안주를 먹는 거예요. 그리고 중동 선후배가 만나면 충성! 하고 머리로 술상을 치고 폭탄주를 들었죠.(웃음) 아무튼, 건강관리를 좀 하셨어야 했는데..

 

이명학 : 다른 학교 언론인들이랑은 분위기가 달랐군요?

장영섭 :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우리 중동 언론인들이 안타까운 게 있는데, 여담으로 말하자면.. SK 창업자(최종건)의 아들인 故최윤원(62회)이 SK케미컬 회장으로 있을 때 중동 언론인들에게 잘해줬어요. 포천에 있는 골프장을 완전히 전세 내다 시피 해서 중동 언론인들을 다 불러서 골프를 함께 치고, 라운딩이 끝난 뒤에는 클럽하우스에서 폭탄주도 마시고 ‘중동 중동 빅토리!’하면서 응원가도 합창하고...다 옛날이야기이죠.

 

이명학 : <백농포럼> 만드셨잖아요. 어떻게 만들게 되셨나요?

장영섭 : 그건 개교100주년기념행사를 끝내고 난 다음해(2007년) ‘백농정신’을 그대로 이어나가자는 생각에서 당시 총동문회장이던 박종순 선배(58회), 성백빈(64회)이 주축이 돼서 창설된 것으로 압니다. 박기정 선배가 초대회장을 맡으셨고, 당시 <백농언론인회>회장을 맡고 있던 저보고 부회장을 하라고 해서 <백농포럼>에 관여하게 됐습니다. 박기정 선배 뒤만 쫓아간 셈이죠. <백농언론인회>를 만들어서 박기정 선배가 초대회장을 했고 제가 2대회장을 했고요. <백농포럼>도 저보고 부회장을 하라더니 본인이 전남일보 사장으로 가니까, 지방에서 포럼회장을 맡기가 어렵잖아요. 그래서 제가 장기집권을 하고 있는 거죠.(웃음) 이제 후배들에게 넘겨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명학 : <백농포럼>이 갖는 의의는 무엇인가요?

장영섭 : 평생교육이 필요합니다. 정말 좋은 강사들을 불러다가 삶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듣는 게 얼마나 좋아요. 그 뿐만 아니라 각계에서 활약하는 중동 출신 인사들이 많잖아요. 기업뿐 아니라 학계, 관계, 법조계 등 서로 다른 분야의 동문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서 인사도 하고 서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배우는 게 많아요. 저 역시 포럼덕분에 이인정 선배(57회/前대한산악연맹회장)와 인연이 생겨서 네팔로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다녀온 것도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이명학 : 지금 100회 넘지 않았습니까?

장영섭 : 105회죠. 요즘 포럼이 재정적으로 열악하지만, 심관식 총동문회장이 열심히 지원을 해주고 있어 그런대로 굴러갑니다.

 

이명학 : 기억에 남는 강의는 어떤 게 있었나요?

장영섭 : 전부 다 훌륭했죠. 각 분야에서 정말 훌륭한 분들이 오셨잖아요. 신봉승씨인가, 조선왕조실록.... 그 분이 세종대왕의 위대함을 말씀해주셨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뇌과학자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도 상당히 인상 깊었습니다. 또 동기인 유홍준 교수도 기억에 남고, 전부 다 의미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대 종교학과 배철현 교수도 좋았고요.

 

이명학 : 단일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모여서 이렇게 길게 한 포럼은 없지 않나요?

장영섭 : 없지는 않고, 우리보다 먼저 시작한 부산고등학교 재경동창회의 ‘청조포럼(1996년 12월 출범)’과 우리보다 조금 늦은 경남고등학교 재경동창회의 ‘덕형포럼(2007년 12월 출범)’이 있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전에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장관을 지낸 오명 씨가 초청강사로 오셔서 놀랍다고 말씀 하시는 거예요. 경기고등학교도 이런 게 없다고요. 우리나라 정보통신혁명의 기초를 닦은 오명 씨가 경기고등학교 출신이거든요. “중동고등학교 최고다”라고 하는 건 자화자찬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듣는 소리예요. 경복고 출신으로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를 지낸 김영진은 제가 가장 존경하는 친구인데요. 그 친구가 경복고 아이스하키 선수 출신입니다. 중동도 아이스하키가 유명하잖아요. 그 친구가 “중동고등학교 최고다”라고 몇 차례 얘기하는 거예요. 각 고등학교 OB선수들이 일 년에 몇 번씩 만나서 아이스하키대회를 하나 봐요. 그 때 보면 중동출신이 선후배 간에 제일 깍듯이 하고, 다른 학교 선배들에게도 정말 깍듯이 대한다며, “중동이 최고”라고 그렇게 얘기를 해요. 내 언론계 선배 중에 지금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 하는 이문호 선배도 경기고를 나왔지만 중동에 대해서는 엄지손가락을 들곤 하지요.

 

이명학 : 그런 우리 학교의 전통이 어떻게 형성됐다고 보세요?

장영섭 : 글쎄요. 알게 모르게 몸에 배는 것 같아요. 중동고등학교에서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 거죠. ‘의리 없는 놈들은 쓰레기다’라는 그런 게 그냥 몸에 밴 것 같아요. 저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살면서 의리 없는 사람들은 쓰레기라고....

 

이명학 : 백농선생께서도 의리를 강조하셨죠.

장영섭 : 그렇죠. 원래 백주년 행사 때 의(義)를 내세웠고.... 대의, 정의, 신의였지요. 그리고 중동 출신은 공부 잘하는 애들만 훌륭한 게 아니에요. 그걸 내가 강조하고 싶어요. 우리 학교 다닐 때 사실 나는 앞자리에서 공부만 열심히 하는 축이었거든요. 뒷자리에서 건들거리고, 제가 보기에 그런 사람들이 굉장히 의리가 있고 세월에 의해서 나무가 성장하듯이 인격이 성장하고 사람이 성장하는 케이스를 주변에서 많이 봐요, 중동고 동창 중에서요. 지금 남포면옥을 하는 이재경 동기도 그런데.... 중동고 60회 산악회인 ‘초일회’가 있어요. 재작년에 초일회 동기들이 알프스 트레킹을 같이 갔어요. 나랑 이재경, 서울대 해양학과 교수였던 이창복, 서강대 심리학과 교수했던 조긍호, 사업하는 김세환, 초일회 회장하는 김철호, 그리고 서윤석 성누가의원 원장이 단장으로 함께 갔어요. 서윤석은 스위스 체르마트에 있는 마테호른(4478미터)을 여섯 번인가 정상정복을 하려다가 꿈을 이루지 못해서 매년 체르마트로 산행을 가는데 작년에는 초일회 동기들과 함께 갔었죠.

 

그 때 나랑 같은 방을 쓴 이재경 회장을 고등학교 때는 제가 잘 몰랐는데요.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두 시간 가량을 스트레칭하고 조깅을 하더라고요. 그리고 남을 잘 배려하고 베풀기 좋아하고... 제가 그래서 이재경 한테 말했어요. “이회장은 세월에 의해서 나무가 성장하듯이 인간의 품격이 성장한 사람인 것 같다....”고요. 중동출신에는 그런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우리 60회 동기들은 ‘육당회’라고 일주일에 월, 수, 금 무려 3일을 당구를 쳐요. 이재경이 육당회 회장을, 아까 말했던 역사비평 창간하고 사업을 하는 장두환이 총무를 맡고 있어요. 장두환은 ‘전봉준 연구’를 위해 일억 원을 기증하고 그랬던 친구인데, 걔가 육당회원들에게 점심을 매번 사는 거예요. 육당회에 당구를 치러 나올 경우 월.수.금 점심은 공짜인 셈이죠. 회비는 당구만 치면 만원, 저녁까지 들면 2만원인데 저녁식사 후 2차, 3차를 할 경우에도 이재경이나 장두환이 대부분 술값을 내곤하죠.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주변에 베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의 정신’이랄까 타인에 대한 배려의 정신이 깔려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이명학 : 기억에 남는 은사들이 계시나요?

장영섭 : 주로 담임선생님들이 기억납니다. 1학년 때 담임인 최원근 수학선생님은 말끝마다 ‘보면 볼적에’라는 말을 덧붙이곤 했는데 약간은 촌스럽지만 푸근한 인상의 선생님이었죠. 그리고 3학년 때 별명이 메주였던 전형기 영어 선생님도 생각나네요. 나중에 한양대 교수로 가셨죠. 그분이 영시를 외우라고 해서 고3 때 외웠던 영시, <나무(Tree)>라는 그 시를 아직도 기억해요. 잠이 안 올 때는, I think that I shall never... 로 시작하는 그 시를 암송하곤 하죠. “나무와 같이 아름다운 시를 볼 수 없다... 시는 바보 같은 나 같은 사람이 쓰지만 나무는 오직 하나님이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내용이에요. 고등학교 영어교과서에 있었어요. 그걸 안 외우면 엄청 혼났어요. 그걸 외운 게 평생 기억에 남게 됐네요. 참 그 때 중동고 선생님들이 다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우리 때 서울대, 연대, 고대 합해서 2백 명을 훨씬 넘어 들어갔어요. 서울대만 60명 이상 갔을 거예요.

 

이명학 : 곧 고희(古稀)시잖아요. 인생을 돌아보면서 한마디 하신다면...

장영섭 : 제가 가장 후회하는 것 중 하나는, 삶을 음주와 스트레스로 너무 낭비했다는 것입니다. 폭탄주로 뇌세포가 다 망가진 것 같아요.(웃음) 언론계에 들어와서 주로 정치부에 있으면서 취재는 열심히 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무엇인가 한 분야라도 열심히 공부를 할 걸, 그게 정말 후회가 됩니다. 정말 안 되겠다 싶어서 요새 한문공부를 시작했어요. 인생에서 65세부터 75세가 가장 행복하다고 하잖아요. <백농포럼> 100회 연사셨던 김형석 교수(98세/연세대 명예교수)가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그러면 제가 정말 행복해야 할 시점이 바로 요즘인데... 어쨋든 내 생활은 요즘 중동이랑 대부분 연관되어있어요. 육당회(당구), 초일회(등산)외에도 ‘삼오회’라고 3학년 5반 모임도 정기적으로 하고 있어요. 삼오회에 아까 얘기했던 정태웅, 장두환, 현대아산 사장을 지낸 김종학, 춘천MBC사장을 한 김승수 등 여러 사람들이 한 달 또는 두 달에 한 번씩 모여서 식사를 하고, 또 <논어> 공부모임도 있습니다. 은퇴한 서강대 조긍호 교수, 서울대 이창복 교수, ㈜도시건축소도 대표 정경상 등 동기들과 59회 이상준 선배와 한 달에 두 번 정도 모여 조교수로부터 <논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논어 공부모임 참석자들과 정태웅이 함께 전국걷기모임도 계속하고 있죠. 해변을 따라서 강원도부터 쭉 내려와서 울릉도, 부산, 남해를 거쳐서 지금 순천까지 왔어요. 전국을 같이 그렇게 걸으면서 마음을 내려놓은 채 맛있는 음식도 들고 우리 강산을 둘러보는 것이죠.

이렇게 모든 게 중동과 다 연관이 되어 있는 거예요. 거기에 <백농포럼>, <백농언론인회>까지. 완전 다 중동이죠. 동기생들과의 50년 우정, 그리고 중동동문회에서 알게 된 선후배 간의 좋은 관계가 제 삶에 활력을 주고 풍요로운 토양이 됐다고 말하고 싶어요. 실상 저는 정치부 기자를 오래 해서 정치 쪽만 어느 정도 알고 다른 부분은 잘 몰랐어요. 제가 <백농언론인회> 관여도 했지만 연합뉴스 사장으로 재직할 때 중동개교백주년추진위원회 홍보위원장을 맡았어요. 그런 일을 통해서 저는 많은 후배 기업인들, 다른 분야의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됐고 이것이 제 삶의 폭을 넓혔다는 차원에서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손연호 경동나비엔 회장(64회) 이용한 원익 회장(66회), 배석두 SECO 그룹 회장(66회), 유경선 유진그룹 회장(67회), 오의용 태평백화점 회장(68회), 크레신 이종배 회장(70회), 한국프라마스 남일 부회장(70회), 팬택 박병엽 부회장(73회) 이런 후배들을 알게 됐죠. 제가 정치 쪽, 언론 쪽에만 알고 있던 사람들을 넘어서 다른 분야도 알게 됐으니 저의 삶의 폭이 중동을 통해 넓어진 셈이죠. 특히 <백농포럼>을 통해 많은 중동 선후배를 알게 된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

 

이명학 :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장영섭 :삶의 매 순간 충실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열심히 살아야죠. 제 언론계 후배 중에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곤 했어요. 나는 경제부에 가고 싶은데 문화부에 있다. 왜 사회부에 있나, 정치부에 있고 싶은데, 이런 불만이죠. 어느 분야에서든 열심히 일하게 되면 결국 그 인간됨과 능력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어느 분야든지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결국엔 자기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제 생각엔, 우리가 좋은 인간관계, 타인에 대한 배려, 더불어 사는 삶 이런 것들이 결국엔 자기에게 돌아온다고 생각해요. 나는 제대로 못했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중요해요.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아서 뭐하나’ 이런 책도 있잖아요. 더불어 함께하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기에,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한 투자, 즉 하루 30분이라고 운동을 하고 책을 읽는 것을 습관화 한다면 금상첨화이겠죠.

 

이명학 : 오늘 오랜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2016.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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